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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영전 벽화 - 육조도정도(六祖搗精圖:혜능이 방아를 찧다) 본문
중국 당대에 형성된 선종은 근원적인 본래심(本來心) 즉 불성(佛性)을 자각하고 그 지혜와 덕성을 일상 속에서 완성하고 전개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장 본질적인 가르침이 선(禪)수행이라고 여겼기에 이 전승의 출발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첫번째 조사는 가섭 존자이며 두 번째는 아난 존자이다. 이후 27조 반야다라 존자를 잇는 28조가 바로 달마(達磨) 대사이다.
남인도 향지국의 태자였던 달마 대사는 인도 28조이면서 중국 초조(初祖)가 된다. 그로부터 2조 혜가(慧可) 대사, 3조 승찬(僧璨) 대사, 4조 도신(道信) 대사, 5조 홍인(弘忍) 대사에 이르렀고, 홍인에게서 6조인 혜능(慧能) 대사가 나왔다.
그래서 서천(西天) 28조와 동토(東土) 6조를 합쳐 33조사를 헤아리고, 이를 지혜의 등불을 잇는 전등(傳燈)의 정통으로 삼는 전통이 생겨났다.
[글: 최성규 / 사단법인 한국전통불교회 불화연구소]에서 발췌
사찰의 여러 전각(殿閣)에 그려지는 벽화 가운데 소재면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역대 선조사(禪祖師)를 소재로 한 것이다.
화엄사 영전 벽면에는 5조 홍인(弘忍) 대사와 6조 혜능(慧能) 대사의 대화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다.
혜능 대사는 당나라 태종 12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나무장사를 했다.
그러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하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홀연히 깨우쳐 홍인 대사를 찾아가 법을 구했다. 홍인 대사는 그가 큰 그릇임을 첫눈에 알았지만 주위의 시선을 느껴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는 소임을 주었다.
그 뒤 혜능은 후원에서 장작도 패고 힘이 부족하여 돌을 짊어지고 방아를 찧었다.
어느 날 홍인 대사는 자기의 대법을 상속할 제자를 선출하기 위해서 누구라도 각자 깨달은 진리를 자기에게 제시하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신수 대사(神秀大師)가 홍인 대사가 잘 다니는 벽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바로 보리의 나무요(몸은 깨달음의 나무)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명경대와 같으니(마음은 밝은 거울)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勿使若塵埃(물사약진애) 먼지가 끼지 않게 하여라.
비록 무기명으로 썼지만 신수 대사가 아니면 이러한 글을 쓸 사람이 없다며 모든 대중들은 시를 보고 야단들이었다.
방아를 찧던 혜능도 어린 사미승이 이 글을 외우는 것을 듣고 그 전말을 자세히 알았다.
그날 밤 혜능은 한 사미승에게 자기가 구술한 것을 그 게송 옆에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그는 글을 몰랐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보리(菩提)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명경도 또한 대가 아닐세
本來一無物(본래일무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요.
신수보다 한층 더 탁월한 이 시를 보고 대중의 논란은 분분하였다.
그때 홍인 대사가 와서 이를 보았지만 혜능의 몸에 위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그의 신을 벗어서 그 게송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남의 눈을 피해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육조 혜능을 찾아갔다. 그리고 쌀을 찧고 있는 혜능을 보고 물었다.
"쌀을 다 찧었느냐(공부는 다 되었는가 하는 뜻)?"
"쌀은 다 찧었는데 아직 키질을 하지 못했습니다(공부는 다 되었으나 아직 인가(印可)를 못 받았습니다."
돌연 홍인 대사는 지팡이로 방아 머리를 “탁, 탁, 탁” 세 번 치더니 뒷짐을 지고 묵묵히 돌아가 버렸다.
혜능은 선뜻 그 뜻을 알아들었는데,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친 것은 밤 삼경(三更)을 뜻하는 것이요, 뒷짐을 지고 가신 것은 뒷문으로 오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그날 밤 삼경에 조실 방으로 가니 그곳에 병풍이 돌려져 있었다. 그 병풍 뒤에 앉아서 금강경을 한 번 강의하고 달마 대사로부터 받은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전수하여 선종 제육조 대사로 인가하였다. 그리하여 육조(六祖) 혜능 선사(慧能禪師)는 양자강 이남에서 선종(禪宗)을 크게 선양하여 남종(南宗)의 조종이 되었다.
혜능 대사는 소양의 조계산에서 선법을 크게 일으켜 그 법을 이은 제자만 40여 명이나 되었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76세로 입적하였다.
남화사는 바로 육조 혜능 대사가 살면서 수행하시던 곳이니 중국 선종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절인데다 그곳이 위치한 조계산의 이름을 따 대한 불교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읽고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等身佛)은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의 금불각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의 이름이다. 소설 속에서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는 실제로 찾아보면 없다.
그러나 양자강 북쪽에는 육조 혜능이 법을 이어받은 오조사가 있고 여기에 5조 홍인대사의 등신불이 있다.
5조 홍인의 법을 이어받은 6조 혜능 역시 열반 한 후 그의 법체는 등신불이 되어 샤오관(韶關) 남화사(南華寺)에 봉안되어 있다.
등신불은 단순한 소설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 오늘날 중국에는 10여곳 이상에 등신불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 법진, 이원일 공저(2016). 「혜능 일대기로 읽는 육조단경」. 블루리본]
광동의 소관(韶關)시 남화사(南華寺)에 모셔진 육조 혜능의 진신(眞身)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