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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 작품소개 및 기념비 본문
천 만부 이상 판매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한국문학사의 독보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은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였던 곳이다. 벌교 읍내 곳곳에 남아 있는 소설 속 흔적을 찾아 문학기행을 떠났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 장편소설 '태백산맥'은 광복과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격동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
서사적 공간이 전라도 벌교를 사건의 시원지로 하여 지리산 일대로, 그리고 태백산맥을 따라 전 국토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시공간은 민족사의 격변과 분단의 비극적 체험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해 온 작가가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그 대결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찾아낸 역사적 상황의 한복판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분단상황의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그 소설적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분단문학의 최대의 성과로 지목되고 있다.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보성군 전체 인구는 약5만명인데 30%가 벌교읍에 거주한다. 벌교는 과거부터 지리적으로 순천만과 여자만을 끼고 고흥과 순천 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일제 강점기에도 식민지 수탈을 위한 포구로 개발을 시킨 곳이다. 벌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라는 소설 속에서 새롭게 부각된 마을이지만 역사의 굴레 속에서 함께 살아온 현장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분단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들 앞에서 떠오르는 두 개의 세계, 즉 한의 세계와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뛰어난 솜씨로 결합시키면서 그것을 통하여 뜨거운 감동의 공간을 창조해 내고 있다.
그 공간은 우리 시대가 이룩할 수 있는 소설적 총체성의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80년대 문학의 한 장관을 보여주고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동화 (문학평론가)
염상구는 해방이 되면서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있었다.
기골이 남달랐으며 언변도 변사 빰칠 만큼 늘었고, 특히 온몸에 서늘한 살기를 감고 있었다. 염상구가 주먹패의 '오야붕' 쟁탈전에서 '땅벌'을 연거푸 칼 세 개를 어깨, 팔, 허벅지에 꽂아 꺾고 , '쌍칼'이란 별병을 얻으며 주먹세계를 장악했다.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 부터였다.
염상구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경찰이 그렇다 하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애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청년단장이 된 염상구의 새로운 각오 '빨갱이는 씨를 말려뿌러야 혀'
하대치가 속했던 소작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염상진이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오고서도 교편을 잡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일본놈 정신을 가르쳐야하는 선생질을 하는 것은 일본놈 순사나 군인이 되어 독립군을 잡아 고문하고, 뒤쫓으며 총질하는 것과 똑같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사범학교를 디니게 된 것도 순전히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하대치의 눈에는 그는 아는 것이 너무도 많았고,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소작회 12명은 징용에 끌려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염상진은 재판을 받아 2년이나 징역살이를 했다. 출감 후 그의 집에 징집영장이 날아들었는데 염상진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해방이 되기까지 3년동안 그림자 한 번 비추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가 무섭게 모습을 나타낸 그는 '금강산에서 중 노릇 했다'는 무뜩뚝한 한마디로 그동안의 행적을 일축해 버렸다. 하대치와 염상진은 5년 만에 해후를 했다. 그때 염상진이 격한 어조로 터뜨린 첫마디가 '하 동무'였다.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다.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로서 소작농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면 필연적으로 봉건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식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그런 자책과 죄의식의 과정은 아예 생략되었고, 이상세계의 빠른 실현을 위해 지주계급이나 경제적 지배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무산자들의 힘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무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속단하지 마셔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어요.
그런 분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겨'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 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하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소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쏘는 자기네들 이익추구을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수 없어요."
하대치의 아버지 판석 영감은 원래 벌교사람이 아니고 고향은 나주였다. 나주벌의 대지주 송진사댁의 가복이었다. 가복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지만, 글을 깨치고 있었다. 어깨너머 귀동냥 눈동냥으로 배웠으니 그의 총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아들 하대치가 스무살 가까워질 무렵부터 일본인 지주한테 대항하여 소작쟁의를 벌여 피걸레가 되어 내던져진 아들, 하대치와 함께 소작쟁의를 벌인 소작회 12명이 징용으로 끌려갔다. 북해도 탄광으로 비행장을 닦는데에 5년여 끌려다니다가 해방과 함께 돌아온 하대치는 이미 마음이 변해 있었다. 하대치의 아버지는 동학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동학도들의 분노가 불붙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가복의 사슬을 끊고 동학의 선봉물결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하대치 할아버지는 송진사에게 덕석말이 매타작으로 죽게 된다. 판석영감은 아들 하대치와 며느리 들몰댁, 가족 모두를 데리고 별교로 오게 된다.
그녀의 머리에는 옷고름 너비의 새빨간 천이 질끈 동여매져 있었고, 뽑아 늘인 목에는 힘줄이 불끈 돋아올라 있었다.
그녀느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그 새빨간 천을 질끈 동여매고는 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그것을 풀어 정성스럽게 접어가지고 몸뻬 주머니에 넣었다.
새빨간 천을 낭자머리 위에 매듭진 그녀의 모습은 남자대원들이 무색할 정도로 용맹스럽게 보였다.
"야이 씨불랄년아! 집구석에서 좆이나 뽈제 멀라고 입산혀갖고 재수대가리 없이 나스고 지랄이냐아!"
적진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허, 저눔이 얄랑궂은 소리 허네?"
외서댁이 헛웃음을 치며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대원들의 얼굴이 어색하고 민망해져 있었다.
그런데 외서댁이 숨을 들이켰다.
"야이 씨불랄눔아! 뽈자도 뽈 좆이 웂어 입산혔따. 니눔 좆대감지럴 뿌랑구가 뽑히게 뽈아줄 팅게 당장에 올라오니라, 올라와!"
부들부들 떨어대며 외치는 외서댁의 목청은 아까보다 훨씬 컸다.
하얀 꽃, 이름처럼 아름다운 무당 월녀의 딸 소화.
어린 학생시절부터 정하섭은 소화를 "무당이 아니라면.."하면서 마음에 품었고, 또한 소화도 '신령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정하섭을 맞이하며 돕는다. 정하섭은 소화를 찾고, 소화에게 어머니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하고 공작금을 전해받는다. 김범우는 정하섭이 1946년 4월 중학교 졸업반때 사회과 선생님으로 만났다. 정하섭은 그 학교 좌익서클의 핵심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