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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심수관 도예 전시관

곤지둑 2016. 3. 18. 17:23

『남원 심수관 도예전시관 (沈壽官 陶藝展示館)

소재지; 전북 남원시 양림길 14-16 (어현동 37-149) | 문의처; 063) 620-6835 | 이용시간; 09:00~18:00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료; 춘향테마파크 입장료 3,000원에 포함


전라북도 남원의 대표적인 관광지의 하나인 '춘향테마파크'에는 '남원 심수관 도예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심수관(沈壽官)''심당길(沈當吉)'의 후예(後裔)이며, '심당길'은 정유재란(1957)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나에시로가와 마을에 정착한 후,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사쓰마야키(薩摩燒, Satzuma Ware)의 원조가 된 남원 출신의 사기장이다.


1998년은 조선의 사기장 심삼평이 일본에 끌려간 지 400년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남원에서 도자기의 '혼 불'을 채취해 사쓰마에 안치하는 국제 이벤트 '400년만의 귀향'을 추진하였다. 이때 고국을 찾은 15대 심수관은 12대부터 15대까지의 심수관 도예작품 13점을 남원시에 기증하였다.

이에따라 남원시에서는 400년 망향의 아픔을 딛고 세계적인 명품도자기를 만들어낸 심수관의 역사를 조명하고 역대 심수관의 기증작품을 통해 한일교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2011년 12월에 심수관도예전시관을 설립개관하게 되었다.



정유재란(1597)'도자기 전쟁'으로 불린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조선에 비해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었다. 조선의 막사발조차 일본에서는 '이도다완(井戶茶碗)'으로 불리며 최고의 예술품으로 대접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도가 융성하여 다이묘(영주)들에게 조선 도자기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전쟁기간 내내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끌고 갔다.


 사쓰마야키(薩摩燒, Satzuma Ware) 세계적인 도자 브랜드로  조선 사기장 심당길(沈當吉)을 원조로 하여 후손 15대로 이어지는 심수관(沈壽官가문은 417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고 도자의 맥을 잇고 있다.


정유재란 때 사쓰마에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은 80명가량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들을 끌고 간 사람은 시마즈 요시히로 사쓰마 번주(藩主)였다.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유재란에 참전한 시마즈는 1597년 8월 전북 남원성을 함락시키는데 이때 성 외곽에 살던 사기장들을 붙잡아 끌고 갔다이들 속에 사기장 심당길과 박평의가 있었다

심수관이라는 이름은 심평길의 12대 손인 심수관부터 이어받고 있는 이름(습명襲名[각주:1])이다왜 12대부터 습명이 이뤄졌을까바로 그때부터 개인 가마를 열고 장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심수관가의 도자기를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에 각인시킨 것은 금채(金彩: Gold painting technique)기법이다.

백자를 구워낸 후 유약을 바른 표면 위에 금으로 표현하는 기법이 금채기법으로 이러한 화려한 장식의 도자기를 '금란수' 혹은 '긴란데'라 부른다. 이들 도자기는 오스트리아 빈이나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서구인들을 매료시켰고 국내외에 사쓰마도자기의 확고한 지위를 부여했다. 금채기법은 화병 뿐 아니라 향로, 인형상, 다도구와 일상용품에도 폭넓게 사용되었다.







심수관가()의 도자기는 일본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일본화에 흔히 나타나는 금색화와 채색화, 지극히 정치(精緻)하고 섬세한 조각과 투각(透刻)기술은 한국적이라고 하기에는 조선백자의 전통과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왜 한국 핏줄이면서 일본적인 도자기를 굽는가.”

 

도자기든 뭐든 모든 문화유산은 주어진 환경의 산물입니다. 도자기 역시 도토와 가마, 사람의 기술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지죠. 한국처럼 도토가 흔치 않은 가고시마 화산지대에 떨어져 주어진 흙을 살리는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죠. 조선백자처럼 멋지고 하얀 도자기는 구울 수 없게 된 겁니다.” 

- 15대 심수관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












도자기는 정치를 반영합니다. 한국 도자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처럼 시대구분이 분명합니다. 과거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패턴입니다. 그러나 일본 도자기는 다릅니다. 그런 경향이 없습니다. 에도시대 번()[각주:2]의 영향을 반영해 지역별로 특화해서 발전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보기에 한국 도자기는 힘이 넘치고 속도감이 있지만 다양성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 도자기는 다양하지만 힘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 15대 심수관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











"당신들, 조선 도공의 후예들은, 2가지 가슴을 가지고 있군요. 하나는, 선진적인 조선의 도예를 일본에 전수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조선 사람의 가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타국의 땅에서 생존을 위하여 투쟁한 일본인으로서의 가슴 입니다."

- 일본의 국민적인 소설가, 시바 료타로(Shiba Ryotaro) -









  1. 일본 전통예술계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는 것을 ‘습명’(襲名, 일본어 발음으로는 슈우메이)라고 한다. 만약 아들이 없거나 있어도 가문을 잇지 못하게 되면 조카나 사위 등을 양자로 들여 이름을 잇게 한다. [본문으로]
  2. 번(일본어: 藩, はん)은 일본의 역사에서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를 가리키는 말로, 일본에서는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키는 역사용어로 사용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