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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목포 근대역사관

곤지둑 2016. 1. 5. 12:04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나주 영산포 출장소 문서고(현 사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현 목포근대역사관 2관) 그리고 목포 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 1관)을 방문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후 동척)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1908년에 설립한 특수 국책회사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전국에 9개의 동척 지점이 있었으나 현재 동척 건물의 원형이 보존된 것은 목포지점과 부산 지점뿐이다. 동척 목포 지점은 영산포에 있던 동척 출장소가 1920년 에 목포로 옮겨오면서 건축한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지금은 이 건물 내부를 단장하여 목포 근대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1912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 조사 사업으로 전국 토지의 4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동척은 일본 소유의 땅을 농민들에게 50퍼센트의 소작료를 받고 내주었고 또 장리쌀을 20퍼센트의 이자로 빌려 주었다. 그 외 곳곳에 일인 지주들이 농장을 열고 많은 땅을 소유하면서 지주로 군림했고 왕조시대의 지주보다 높은 지대를 받아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일제는 1935~1939년사이 5년 동안 우리나라 미곡 생산랑 2천만섬 중에서 약 절반에 해당하는 900만섬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이를 두고 보통 '기아수출((飢餓輸出))'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수탈이었다.

그들은 또 만주를 식민지화해서 식량기지로 삼았는데 그곳으로부터 이른바 '만주속(滿州粟)'이라는 잡곡을 이 땅에 들여왔다.

이들 잡곡은 우리 농촌에 공급되었고 우리 농민들은 좋은 쌀을 빼앗기고 이 조잡한 잡곡으로 연명했다. 그리고 농민들 대다수는 '이밥'은 생일이나 명절에 먹어볼 정도였고 꽁보리밥, 잡곡, 감자, 강냉이 따위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우리역사의 7가지 풍경』(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1)




홍어로 유명한 영산포에는 1910년에 세워진 동양척식회사의 문서고가 남아있다(지금은 개인 사유지). 

1910년 7월 일제는 궁삼면(영산․세지․왕곡) 일대의 하천답 1만4552정보와 묘지 1800필지를 8만원에 강제로 매수하였다. 당시 토지는 고종의 후궁인 엄귀인이 거처하던 경선궁(慶善宮)의 속지(屬地)였다. 일제는 이곳에 동양척식회사 영산포출장소를 개설하고 그 땅을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넘겼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이 이곳 영산포에 들어와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4년에 작성된 자료에 당시 이곳 영산포 인근에서 쌀 6만5천석, 보리 2천석, 목화 1만근을 생산해 일본으로 거둬갔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대대적인 수탈이 자행되었다.

“그 집 뒤에 있는 벽돌집이 예전에 동척(동양척식회사) 문서고였다드만. 

그 집은 숙직실이고. 일본사람들이 동척 땅 불하 받아 조선사람들 한테 소작 받았다드만. 여그 땅이 다 일본놈들 것이었어” 

영산강변에서 길을 가르쳐 주던 김영태(78) 어르신이 일러준 이야기였다.

[http://www.jeonlado.com에서 발췌]


한편 1900년에 지은 구 목포일본영사관(사적 제289호)은 목포시내와 항구가 한눈에 들어오는 유달산 자락에 들어선 붉은 건물로 이 땅 백성들을 주눅들게 한 식민지 지배자의 ‘권력’이자 새로운 ‘얼굴’이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목포문화원, 목포시립도서관 등으로 쓰다가 최근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