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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 본문
천 만부 이상 판매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한국문학사의 독보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전남 보성군 벌교읍은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였던 곳이다. 벌교 읍내 곳곳에 남아 있는 소설 속 흔적을 찾아 문학기행을 떠났다.
보성군 전체 인구는 약5만명인데 30%가 벌교읍에 거주한다. 벌교는 과거부터 지리적으로 순천만과 여자만을 끼고 고흥과 순천 등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여서 일제 강점기에도 식민지 수탈을 위한 포구로 개발을 시킨 곳이다. 벌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라는 소설 속에서 새롭게 부각된 마을이지만 역사의 굴레 속에서 함께 살아온 현장이었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 장편소설 '태백산맥'은 광복과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격동기를 무대로 하고 있다.
서사적 공간이 전라도 벌교를 사건의 시원지로 하여 지리산 일대로, 그리고 태백산맥을 따라 전 국토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시공간은 민족사의 격변과 분단의 비극적 체험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해 온 작가가 이데올로기의 선택과 그 대결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찾아낸 역사적 상황의 한복판에 해당된다. 이 작품은 분단상황의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그 소설적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분단문학의 최대의 성과로 지목되고 있다.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분단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들 앞에서 떠오르는 두 개의 세계, 즉 한의 세계와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뛰어난 솜씨로 결합시키면서 그것을 통하여 뜨거운 감동의 공간을 창조해 내고 있다.
그 공간은 우리 시대가 이룩할 수 있는 소설적 총체성의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80년대 문학의 한 장관을 보여주고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동화 (문학평론가)
소설「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이 있었던 1948년 늦가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제석산자락에 자리잡은 현부자네 제각 부근에서부터 시작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이 끝나가던 1953년 늦은 가을 어느 날까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픈 과거를 반추해내고 있다.
지식인 출신 염상진과 그를 따르는 하대치, 회의하는 지식인이지만 역사로 부터 끊이없는 선택과 실천을 강요당하는 김범우, 이성적인 국군장교 심재모, 우익 청년단장 염상구, 손승호, 선민영, 안창민, 소화와 이지숙, 외서댁, 들몰댁 등 그들이 엮어내는 크고 작은 사건을이 씨줄이 되고 날줄이 되어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베로 짜여진 것이다. 그 베는 민중의 나날의 삶과 역사가 되어 완벽하게 조화되고 호응하여 일치한다.
반란군 토벌대장 임만수와 대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남도여관의 실제 모델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구 보성여관’(등록문화재 제132호)이다.
문화재청 산하 특수법인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원형 그대로 복원해 찻집과 숙박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보성여관은 현부자집 소유로 벌교에서 하나뿐인 여관이었다.
“토벌대장 임만수가 벌교에 열흘 정도 머무는 동안 벌교의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성의 지주들까지 남도여관의 뒷문을 드나들었다”는 등 빨치산 토벌대원들의 숙소로 등장하는 보성여관은, 『태백산맥』의 무대 가운데 정식으로 복원된 최초의 사례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태백산맥 3권 85쪽)
벌교금융조합은 붉은 벽돌을 바탕으로 하고 그 사이사이에 돌을 깎아 박아 건물의 견고함과 장식적 효과를 동시에 노린, 일본인들이 관공서형 건물로 즐겨 지었던 그 모습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지난 역사를 반추하게 해주고 있다.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 잡아 고객들의 편리를 최대로 도모한 세심함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금융조합장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 근무해온 이력을 지닌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가 척결되지 못한 이 땅의 비극이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그런 식으로 기득권을 행사했음을 작가는 여러 주인공들을 통해 일깨우고 있다.
“금융조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돈 장사이고 보면 그의 이재(理財)솜씨는 멋 부리는 것 보다 한 수가 더 앞질러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태백산맥 1권 284쪽)
송기묵은 돈을 다루는 사람답게 치부에도 능해 은밀하게 고리대금업까지 해가며 탄탄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의 이화여대에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이곳에는 일본식 2층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래층은 일본인들 전용이다시피 했던 벌교 유일의 공중목욕탕이었고, 2층은 창살과 처마 같은 데가 아주 섬세하게 꾸며진 건물이었다. 목욕탕도 폐쇄되고 2층도 사용하지 않아 꽤 낡긴했지만 1995년경까지 그 건물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취 없이 헐려버리고 말았다. 소설에서는 그 2층에 염상구의 아지트인 청년단이 들어 있다.
'홍교(횡갯다리)'는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량으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서기 1728(영조4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보시로 홍교를 건립했다.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춰섰다. (…)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7쪽)
이무기돌.
이무기돌은 홍예교(虹霓橋)의 최상단 안쪽 중앙에 설치하는 것으로, 상상 속의 동물인 서수(瑞獸)머리 모양으로 조각한 석물(石物)이다.
이무기는 천년을 묵어야 용(龍)이 된다는 전설의 동물로, 천년의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니 그 서기가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장마철에 거칠 것 없이 불어난 물살이 수마(水魔)처럼 기세등등하게 홍예교를 삼킬듯 달려오다가, 홍예교 중앙에 몸을 숨기고 있는 이무기돌을 보면 깜짝 놀라 기세를 누그러뜨려 얌전히 다리를 지나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즉, 이무기돌은 수마로부터 다리의 안전과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악귀를 막아 주기를 염원하는 주술적인 의미의 석물(石物)인 것이다. 예전에는 이무기돌의 코 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다름아닌 뗏목다리로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속단하지 마셔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어요.
그런 분류들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 절대다수의 민중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집단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굳이 '민족의 발겨'이라고 했어요.
형은 그게 바로 인민 혁명세력의 규합이라고 말하지 모르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 민족에는 일체의 정치성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아니, 더 확실하게 말해 그 민족 아래 모든 정치이념들은 단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국과 소련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쏘는 자기네들 이익추구을 위해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는 훼방꾼들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갈려 이념을 먼저 선택하면 우리 민족은 결국 분열밖에 할수 없어요."
소설 속에서 빨갱이로 몰려 순천경찰서에 갇힌 김범우를 구하기 위해 김사용 영감이 문중회의를 열었던 곳이다. 김범우의 집 대문은 문간채 형식으로 지어진 대문으로 바깥에 담을 두르고 있다.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집안 소유의 집이다.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랫채에서 초등학생이었던 작가가 친구인 이집 막내 아들과 자주 놀았다는 것은 작은 흥미를 일으킨다. 소설에서는 품격있고 양심을 갖춘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붉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허겼는가. 맘 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태백산맥 1권 141쪽)".
민가나 격이 낮은 건물에서는 네모기둥을 쓴다고 알고 있는데 궁궐이나 관청 등 지체높은 집을 건축할때 사용된 둥근기둥의 안채가 인상적이다.
사랑채, 겹안채, 창고 자리, 장독대, 돌담 등 그 모든 형태와 규모들이 대지주의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안채 오른쪽 앞부분 귀퉁이에 있는 돼지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대주주라 하더라도 음식 찌꺼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으려고 돼지를 길렀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의 알뜰함과 환경오염을 막고자 했던 살아있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 집에서도 오른쪽으로 고읍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 자리를 무심코 잡은 게 아님을 보여준다.
하얀 꽃, 이름처럼 아름다운 무당 월녀의 딸 소화.
어린 학생시절부터 정하섭은 소화를 "무당이 아니라면.."하면서 마음에 품었고, 또한 소화도 '신령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정하섭을 맞이하며 돕는다. 정하섭은 소화를 찾고, 소화에게 어머니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하고 공작금을 전해받는다.
"조그만 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 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무당 소화네 집의 모습이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 안의 앞터에 있었다.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 숲이 집을 보듬듯하고 있었다.
'그건 바람소리만이 아니었다. 뒤란의 돌담에서 울려 바람에 섞인 소리. 그건 돌이 맞갈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누군가가 돌담을 밟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소리였다. 베틀에 올려진 명주올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그녀의 신경줄들은 격자창으로 뻗어가 있었다.'(태백산맥 4권 205쪽)
소설 속에서 소화의 연인인 정하섭이 밤중에 몰래 소화의 집으로 찾아오는 장면이다.
어머니인 무당 월녀와 함께 사는 이 집은 방 셋에 부엌 하나인 구조로 돼 있다. 소설에서 그려진 소화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담한 모습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 집에서 정하섭과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머나먼 여정을 떠난다.
소설 첫 장면에 나오는 현부자네 집은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고, 이곳을 은신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부자네 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펼쳐진다.
2층 누마루가 있는 문간채. 가운데 누마루가 있는 출입문이 있고, 양쪽에 방이 2칸씩 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문간채와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그 자리는 더 이를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소설 속에서 이 누각은 현부자가 올라앉아 기생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면서 자기 소유의 중도들판을 내려다보던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누각에 올라 자기 소유의 들판을 내려다보는 일은 지주의 몫이다. "저것이 다 내 땅이여······."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헛웃음 풀풀나도록 흐뭇했겠지.
하지만 소작농의 몫은 무엇이었나. 현부자의 시선에 짓눌리면서 그 들판에서 일해야 했던 소작농들. 고픈 배를 움켜지고 뙤약볕아래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던 그들에게 그 누각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대문을 들어서면 자연석을 쌓은 화단이 있는 정원과 그 뒷편으로 안채가 보인다. 마당에 정원을 조성하는 것은 전통한옥에서는 거의 없는 경우로 일본 주택 정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 앞에 양옥이나 일본주택의 출입문처럼 돌출된 출입구를 두고 있는 집이 독특하다. 기와지붕을 올리고 한옥의 목조구조형태를 하고 있지만 한옥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일본식 양식이 반영되었지만, 아궁이가 있는 온돌방있고 전체적인 형태는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연면적 1,375㎡(415평), 2층 규모의 문학관에는 159건·719점의 육필원고, 작가의 수첩 등 다양한 증여 작품이 전시돼 있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육필원고였다. 장장 1만6천500장에 달하는 원고를 보고 있자니 저 엄청난 분량의 글을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긴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을까하는 안타까움과 존경심이 동시에 느껴진다.
4년간의 작품 준비기간과 6년간의 집필과정 등 그가 온 몸으로 쓴 태백산맥의 열정이 고스란히 문학관에 담겨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인 벌교 여행의 시작이자 끝은 바로 이곳 문확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염상구는 해방이 되면서 쫓김을 당하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일본놈을 용감하게 처치한 당당한 독립투사로 변해있었다.
기골이 남달랐으며 언변도 변사 빰칠 만큼 늘었고, 특히 온몸에 서늘한 살기를 감고 있었다. 염상구가 주먹패의 '오야붕' 쟁탈전에서 '땅벌'을 연거푸 칼 세 개를 어깨, 팔, 허벅지에 꽂아 꺾고 , '쌍칼'이란 별병을 얻으며 주먹세계를 장악했다. 염상구가 형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은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공산당의 모든 조직이 지하로 잠적하면서 부터였다.
염상구는 공산당이나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 필요도 없었다.
경찰이 그렇다 하니까 적이었고, 형이 가담해 있으니까 더욱 적이었다.
청년단장이 된 염상구의 새로운 각오 '빨갱이는 씨를 말려뿌러야 혀'
하대치가 속했던 소작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염상진이었다. 그는 사범학교를 나오고서도 교편을 잡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일본놈 정신을 가르쳐야하는 선생질을 하는 것은 일본놈 순사나 군인이 되어 독립군을 잡아 고문하고, 뒤쫓으며 총질하는 것과 똑같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농사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사범학교를 디니게 된 것도 순전히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하대치의 눈에는 그는 아는 것이 너무도 많았고,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소작회 12명은 징용에 끌려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염상진은 재판을 받아 2년이나 징역살이를 했다. 출감 후 그의 집에 징집영장이 날아들었는데 염상진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해방이 되기까지 3년동안 그림자 한 번 비추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가 무섭게 모습을 나타낸 그는 '금강산에서 중 노릇 했다'는 무뜩뚝한 한마디로 그동안의 행적을 일축해 버렸다. 하대치와 염상진은 5년 만에 해후를 했다. 그때 염상진이 격한 어조로 터뜨린 첫마디가 '하 동무'였다.
사회주의 서적을 접하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다.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로서 소작농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에 대하여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면 필연적으로 봉건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인식의 기둥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염상진에게는 그런 자책과 죄의식의 과정은 아예 생략되었고, 이상세계의 빠른 실현을 위해 지주계급이나 경제적 지배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무산자들의 힘의 조직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김범우가 인간생존의 양심을 밝히는 불씨를 얻었다고 한다면, 염상진은 인간생존의 방법을 뒤바꾸는 무기를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대치의 아버지 판석 영감은 원래 벌교사람이 아니고 고향은 나주였다. 나주벌의 대지주 송진사댁의 가복이었다. 가복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지만, 글을 깨치고 있었다. 어깨너머 귀동냥 눈동냥으로 배웠으니 그의 총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아들 하대치가 스무살 가까워질 무렵부터 일본인 지주한테 대항하여 소작쟁의를 벌여 피걸레가 되어 내던져진 아들, 하대치와 함께 소작쟁의를 벌인 소작회 12명이 징용으로 끌려갔다. 북해도 탄광으로 비행장을 닦는데에 5년여 끌려다니다가 해방과 함께 돌아온 하대치는 이미 마음이 변해 있었다. 하대치의 아버지는 동학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동학도들의 분노가 불붙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가복의 사슬을 끊고 동학의 선봉물결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하대치 할아버지는 송진사에게 덕석말이 매타작으로 죽게 된다. 판석영감은 아들 하대치와 며느리 들몰댁, 가족 모두를 데리고 별교로 오게 된다.
"들몰댁 맘이야 고맙지만, 내 당허는 고상은 암시랑 않소.
내 고상 막을라다가 그분하테 화 돌아가먼 그 후회, 그 한스러움을 어찌 허란 것이요.
그분만 건강허고 무사허먼 나넌 무신 고상을 당혀도 아무 상관이 웂소.
몸이 당허는 고상을 마음이 못 이기먼 고상이 되는 것이고,
몸이 당허는 고상을 마음이 이거먼 고상이 아닌 법이요.
나가 고상을 당해 그분이 무사헐 수만 있다면 요런 고상이야 평생도 당허것소.
소화는 헛것을 보는 것 같은 몽롱한 눈으로 마치 주문을 외듯이 느리고 낮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옷고름 너비의 새빨간 천이 질끈 동여매져 있었고, 뽑아 늘인 목에는 힘줄이 불끈 돋아올라 있었다.
그녀느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그 새빨간 천을 질끈 동여매고는 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그것을 풀어 정성스럽게 접어가지고 몸뻬 주머니에 넣었다.
새빨간 천을 낭자머리 위에 매듭진 그녀의 모습은 남자대원들이 무색할 정도로 용맹스럽게 보였다.
"야이 씨불랄년아! 집구석에서 좆이나 뽈제 멀라고 입산혀갖고 재수대가리 없이 나스고 지랄이냐아!"
적진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허, 저눔이 얄랑궂은 소리 허네?"
외서댁이 헛웃음을 치며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대원들의 얼굴이 어색하고 민망해져 있었다.
그런데 외서댁이 숨을 들이켰다.
"야이 씨불랄눔아! 뽈자도 뽈 좆이 웂어 입산혔따. 니눔 좆대감지럴 뿌랑구가 뽑히게 뽈아줄 팅게 당장에 올라오니라, 올라와!"
부들부들 떨어대며 외치는 외서댁의 목청은 아까보다 훨씬 컸다.
'태백산맥'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협박과 회유 속에서 두 번의 유서를 써야했던 조정래는 유서를 쓰면서까지 소설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소설가는 그 시대의 산소여야 한다”는 신념을 밝힌 바 있다.
소설 속 염상구가 벌교 바닥을 접수하기 위해 깡패 왕초인 땅벌과 담력 대결을 벌인 곳이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오래 버티다가 누가 먼저 바다에 뛰어드는지 내기를 해 지는 쪽이 벌교를 떠나는 조건이었다. 결국 염상구는 땅벌을 쫓아내고 벌교를 주름잡게 된다.
"철교의 중앙에 똑같이 서서 누가 더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버티다가 아래 바닷물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를 겨루자는 것'이었다. 염상구가 이겼고, 결투에서 진 땅벌은 그날 밤 "옛 부하 몇 명의 전송 아닌 감시 속에서 고리짝만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1권 244쪽)
소설에서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곳이 이 철다리다.
“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 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태백산맥’ 1권 189쪽)
철교 아래 선창에서 물건을 훔쳐내다 들켜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가 해방과 함께 벌교로 돌아와선 용감하게 일본놈을 처치한 독립투사로 변신한 염상구.
소화 6년(1931년)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소화다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부용교. 그러니 이리저리 생각해도 무당 소화(素花; 흰 꽃)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여순사건때 이리저리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소화다리 밑으로 던졌다고 한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태백산맥 1권 66쪽)
지금은 콘크리트 난간이 있지만 소화 6년에 다리를 세울 때는 쇠난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제가 쇠붙이 공출을 한다며 쇠난간까지 뜯어갔고, 여순사건 당시에도 그 난간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제가 뜯어가버린 난간 때문에 나중에 소화다리는 학살장으로 악용된다. 난간이 없는 다리에 처형할 사람을 세워두고 총을 쏘면 시체들이 갯벌에 그대로 떨어지게 되니까 시체 처리가 손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