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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호랑이 이야기(1) - 조선은 호랑이 왕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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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호랑이 이야기(1) - 조선은 호랑이 왕국

곤지둑 2016. 5. 31. 21:31

옛날 중국 사람이 조선 사람을 보면 저들은 일생의 반을 호랑이에게 물려가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소비하고 나머지 반은 호환을 당한 사람 집에 조문을 가는 데 쓴다라고 우스갯 소리를 할 만큼 우리나라 산에는 호랑이가 많았다.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견본수묵담채, 90.4 x 43.8 cm, 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부분>


육당 최남선
(1890-1957)같은 학자는 아래의 글에서와 같이 호랑이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물로 꼽았다.

호랑이는 조선 최대의 동물이며 조선인의 생활에 끼친 영향이 크니 그 중 신화, 전설, 동화를 통하여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들은 설화 세계에서 최고이다. 그래서 조선을 호담국(虎談國)이라 할 만큼 범 이야기의 특수한 인연을 가진 곳이 되었다


유독 우리가 호랑이 그림을 좋아하고 민화의 대표격으로 삼는 것은 산이 많은 우리만의 독특한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 1910~1996)은 호랑이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인식에 주목했다.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고 잡아가는 두려운 존재이자 산신같은 신적인 존재이면서 반대로 쾌활하고 멍청하기도 한 인간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녀는 호랑이의 맹수성을 인간성으로 전환한 사실을 한국미술의 클라이막스로 평가한다.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호환((虎患))의 대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민간 신앙에서는 산신령의 사자로서 벽사의 상징으로 경배의 대상이었다. 민화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때로 멍청하고 바보스럽게 그려져 인간적인 존재로 친근함의 대상이었다. 더 나아가 바보호랑이에 당차게 맞서는 까치를 함께 그려 넣어 탐관오리에 저항하는 민중 의식을 담기도 하였다.

<수원 팔달사 벽화 그림>


<양산 통도사 해장보각(海藏寶閣) 벽화 그림>


<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공공누리>


<김유신(金庾信, 595~673)묘의 십이지신상 중 호랑이신상의 탁본, 국립민속박물관, 공공누리>

<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공공누리>

<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공공누리>





<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공공누리>


<12모 호족반(虎足盤) 다리가 호랑이의 다리 형태를 하고 있는 소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공공누리>


<일제강점기 나무를 깎아 낸 후 채색하여 만든 인형, 국립민속박물관, 공공누리>

그러나 일제의 '해수구제(害獸驅除)정책에 따라 서서히 멸종되어 가면서,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은 호랑이를 마지막으로 호랑이는 우리의 산천에서 사라졌다

일본의 한국 호랑이 연구자 엔도 기미오에 따르면 1915년만 해도 경찰과 헌병 3321, 공무원 85, 사냥꾼 2320, 몰이꾼 91252명이 동원되어 조선의 산하를 뒤지며 호랑이와 표범, , 늑대 등을 포획했다고 한다.(출처 정호기75~76). 1915년부터 1924년까지(통계자료가 없는 1917년과 1918년 제외) 8년 동안 사살된 호랑이가 89마리, 표범이 521마리에 달한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야생동물들이 거의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호랑이 박제.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1907년 영광 불갑산에서 포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엔도 기미오가 1980년에 찍은 것이다. (출처: 정호기)


이제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담배를 피우는 호랑이도, 배가 고파서 마을로 내려오는 호랑이도, 곶감이 무섭다고 도망갈 호랑이도 없다. 호랑이가 전해주는 우리의 이야기만 귓 전에 맴돌 뿐이다. 호랑이는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라 동물원의 우리 속에 갇힌 동물로, 긴장감과 현실성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참고문헌]

정병모,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다할미디어(2011)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솔출판사(2003)





KBS 스페셜.E11.160407.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