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jiduk Gazebo
[청송] 청송백자전시관 본문
청송주왕산국립공원야영장 캠핑(2016.08.23~26) 중 4일차(2016.08.26) 청송백자전시관을 방문하다.
조선시대 4대 민요로 활발히 생산되었던 청송백자(靑松白瓷).
조선후기부터 20세기 전반기 까지 문경백자(聞慶白瓷)와 함께 경북, 동북지역을 대표하는 백자였다. 1958년 양은그릇이 나오면서 어려움을 겪게되고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뒤 50년 만인 2007년에 청송군에서 청송백자 복원 사업을 추진하여 마지막 도공인 백자장인 고만경 옹(85세)을 초빙하여 가마터를 새로 복원하고 전수생 등을 두어 청송백자 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민간 도자기를 하층문화로 여겨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웬만한 역사 문헌자료에선 청송백자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나마 19세기 초반에 저술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청송백자를 처음으로 청송지역의 특산물이라고 기록할 정도이다.
이후 청송백자 생산에 대한 기록은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산업지’에 청송군내 3개 마을에 가마 수는 4개로 1년간 생산액을 500원으로 적었다는 기록이 있다. 청송군은 2005년 옛 문헌 등을 바탕으로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 조사연구를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청송내 36개소에 48개의 백자 가마를 찾았고, 시기적으로 16세기부터 청송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청송백자는 ‘청송사기’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청송백자.
설백색의 흰색과 기벽이 매우 얇고 가벼운 특징이 있다.
“계란껍질처럼 얇아 지게에 짊어지고 돌다리도 못 건넌다”고 할 정도이다.
과거 전국적으로 무수히 많은 민요가 생산되었지만, 청송백자만큼 특징을 가진 도자기는 없다. 청송백자는 과거 서민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이자 경북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문경도자기와 함께 경북의 생활도자기였다.
청송백자는 수분 흡수율이 높아 사발에 밥을 담아 두면 밥알이 들러붙지 않고, 잘 쉬지 않아 서민용 생활도자기로 인기가 높았다.
청송백자의 특징은 백자를 만드는 원료에서도 드러난다.
다른 지역의 도자기는 대개 ‘도토’라는 흙을 이용해 빚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청송백자는 ’도석‘이라는 돌을 빻아서 빚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흙보다 돌을 빻아 만든 도토는 점력이 약한 반면, 내화력이 크고 흙에 비해 유난히 희다는 장점이 있다.
청송은 산간 오지여서 유통조건이 매우 열악하며, 등금쟁이(보부상 같은 상인)들이 등짐으로 그릇을 운반해야 하다보니 무게를 줄이기 위해 그릇을 얇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산 높고 골 깊은 청송이라 그릇들은 등짐장수들에 의해 각지로 나갔다. ‘혹여 깨질까봐 지게에 지고선 징검다리도 못 건너니’ 드센 장수들도 청송백자 진 걸음만은 순했다.
청송백자의 유통은 점주에게서 중간상인(등짐장수와 지역장사꾼)이 사기를 받아서 지역주민과 일반인에게 판매 하였다. 청송백자의 가격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으나 제보자들에 의하면 다소 시기적 차이는 있으나, 1950년대의 남자의 하루 품삵으로 사발대접 3~5벌은 살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송백자의 유통권역은 청송을 중심으로 경북 동해안 지역과 남부지역, 서부 내륙지역, 청송군내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동해안 지역에 많이 판매되었는데 이는 거리상 가까우면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등짐장수들이 해산물과 소금등과 교환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문경백자가 상당히 번창하였기 때문에 문경백자와의 경쟁을 피해서 청송백자의 유통권역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기굴에서 사기를 내는 날을 ‘점날’ 이라고 불렀다. 점날에 그릇을 굴에서 내면서 상태에 따라 ‘원기’, ‘중태’, ‘파기’로 분류하였다. ‘원기’는 그릇의 소성상태나 형태가 완전하여 상품으로 판매가 가능한 것이며, ‘중태’는 그릇이 불에 녹아내려 찌그러졌거나 소성이 불완전한 것이다. 이러한 ‘중태’도 사용하는데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지역주민들에게 헐값으로 판매되었다. 이렇게 사발따기 과정에서 분류된 ‘원기’를 종류와 크기별로 마당에 정렬한뒤 장사꾼을 기다린다. 점날이 되면, 각지에서 온 등짐장수와 지역장사꾼들이 20~30명 정도 몰려들었다. 등짐장수들은 점날 이전에 사기공방에 와서 주막에서 숙식을 하면서 기다린다. 점날이 되면 북적이는 손님들로 마을에는 온통 축제분위기였을 것이다.
청송백자는 돌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표면이 다소 거칠고 반점이 섞인 설백색을 띈다.
청송백자에 검은색 작은 반점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원료에서 기인하는데, 도석을 분쇄하여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으로 괴상의 형태인 도석을 분쇄하면서 철분이 분쇄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청송백자의 전체적인 모양은 병과 항아리의 경우 원형을 많이 이룬다. 흔히들 양파모양을 닮아 ‘양파형’이라고 부른다.
그릇의 크기가 작고 소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청송백자는 문양과 부착장식이 거의 없거나 비교적 단순하다. 문양의 그림은 일부 식기류에만 그렸으며, 그림의 형태도 비교적 단순하고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청송백자의 예술적 가치가 낮은 편인 것은 주 소비자가 일반 서민들이여서 가격이 저렴하고 사용하기에 편리한 실용성을 가장 우선으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송백자는 다른 지역의 백자에 비하여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전문지식이 없더라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청송사기(靑松 沙器)는 내화력이 강하고 기벽이 얇으며 가볍고 백옥처럼 희색을 띠는 것이 특징으로 식기, 제기, 생활용구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그중에 가장 많이 제작되는것이 식기로 청송의 사기그릇에 밥을 퍼 놓으면 물이 생기지 않아 밥맛이 좋다고 한다.
“청송사기 특징은 내가 볼 때는 밥맛이야. 청송사기를 그때는 조선사기라 했ᄂᅠᆫ데, 밥맛이 참 좋아. 왜 그런가 하면 왜사기는 아침에 밥을 퍼놨다가 점심때 먹을라꼬 숟가락을 대면 그릇하고 밥이 따로 놀아. 그릇에 물이 생겨서 밥이 그릇에 붙지 않고 빙빙돌아. 그런데 조선사기(청송백자)는 물이 절대로 안 생기고 밥맛이 참 좋지”(고만경)
백옥 같은 낯빛에 진주 같은 광이 난다. 가만 쓰다듬으면, 모래알 같은 결정이 지문의 등고선을 스친다. 계란 껍데기처럼 얇고 공기처럼 가벼워, 투박하게 만지면 바스라질까 사발 들어 올리는 손끝이 예민해진다. 무심한 곡선은 담백하게 우아하다. 이것은 왕실이나 반가의 것이 아닌 민간에서 사사로이 쓰던 그릇이다. 오롯이 땅이 내어주는 것만으로 담담히 빚어 낸 효율적인 선, 이것이 청송백자다.
<출처 : 영남일보 2016-04-26, [지질명소로 떠나는 여행 .2] 법수도석으로 빚은 그릇 ‘청송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