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jiduk Gazebo
[나주] 나주목 금성관 & 나주목사 내아 본문
나주는 삼국시대 이전 마한의 중심지였고 1100년 전 왕건이 견훤과 금성산 전투를 벌였던 요충지였다. 옛 나주, 금성에 원정 온 왕건은 샘터에서 처자로부터 버들잎 띄운 물 한 바가지를 얻어먹고 이 처자와 연을 맺는다. 유명한 버들낭자 이야기이며, 버들낭자는 고려 2대 왕 혜종을 낳아 장화왕후가 된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따왔다. 과거 나주는 오늘날 보다는 지리학적으로나 규모면에서 훨씬 더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통일신라 때 금성이었던 지명이 903년 나주로 바뀌었고, 998년 고려 성종때는 지금의 광역시 격인 12개 목(牧) 중의 하나였다
19세기 말 도(道)로 행정구역이 개편돼 광주가 도청소재지가 될 때까지 천년 동안 남도 제일고을 목(牧)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객사 정문인 망화루와 금성관 사이 중문이 이중으로 배치돼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삼문(外三門) 망화루에서 중삼문(中三門)을 거쳐 가장 안쪽에는 내삼문(內三門)을 거쳐야 금성관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내삼문은 없고 다만 세 칸 규모의 옛터만 남아있다.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었던 나주객사(羅州客舍) 금성관(羅州 錦城館)은 다른 객사 정청건물과 달리 팔작지붕으로 이뤄져 있으며, 건축물엔 위용과 기품이 있고 현판의 금성관 커다란 글씨는 품위와 품격을 엿보인다.
객사(客舍)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는 한편, 관찰사가 관할 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중앙관리를 유숙시키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가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 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동익헌(벽오헌), 서익헌을 복원(2004~2008)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망화루를 지나 금성관까지 넓은 공간에는 덩그러니 중삼문(中三門)만 자리를 지키고 있고,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있으니 쓸쓸한 모습이다.
겨울 평일에 방문하였지만 그 넓은 공간에는 오직 우리 부부이외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고, 겨울 바람마저 세차니 더욱 황량하다. 올 여름에 방문한 전주한옥마을에서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다녔던 기억을 생각하니 더욱 묘한 기분이 든다.
금성관 뒷편에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65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금성관을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주변 동측부지에 있었던 연못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하고 있으니 예전의 찬란했던 모습이 다시 복원 되기를 소망한다.
나주목사내아(羅州牧使內衙)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관저인 곳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는 실제로 나주군수가 생활하였던 곳이였으나,지난 2009년부터는 일반인에게 숙박 체험장으로 개방 운영하고 있다. 대문에 편액에 적힌 금학헌(琴鶴軒)은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하는 선비의 지조가 깃든 집”이라는 뜻이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년(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에 지은 건물로 여긴다. 앞쪽에 퇴칸을 둔 ㄷ자형 집으로 앞면 3칸 규모이며,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다.
나주목사내아 홈페이지 URL : http://moksanaea.na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