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jiduk Gazebo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본문

Travel/전라도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곤지둑 2016. 3. 17. 20:00

우리나라에서 궁궐을 제외하고 관청에서 조성한 정원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개인이 조성한 작은 정원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광한루원은 관청에서 조성한 인공정원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신선의 세계관을 잘 구현한 정원이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전설에 따르면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사는 하늘나라의 옥경(玉京: 수도 혹은 궁궐이라는 의미)에는 광한전(廣寒殿)이 있고 은하수 위에는 오작교(烏鵲橋)가 놓여져 있으며 달나라의 궁전인 계관(桂觀)에는 아름다운 선녀들이 노닐었다고 한다.

그 신선의 세계관,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 명승 제334호 남원 광한루원이다.

광한루원은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廣寒樓)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다.

광한루원이 천상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정문에는 청허부(淸虛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문을 들어서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수령이 450년인 거대한 팽나무가 반겨준다.



팽나무와 함께 광한루원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은 완월정(玩月艇)이다.

완월정은 지상에서 달나라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만든 건물로 직사각형태의 호수를 축조한 후 호수 가운데 지은 수중누각(水中樓閣)이다. 달이 뜨는 동쪽을 향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2층 누각으로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광한루원에는 전설 속의 삼신산(三神山)을 섬으로 조성했다. 왼쪽 섬이 영주산(瀛洲山한라산), 가운데는 봉래산(蓬萊山금강산), 오른쪽 오작교 옆에 있는 섬이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이다. 섬과 섬 사이에는 아담한 구름다리가 있고 영주산에는 영주각이, 봉래산에는 대나무 숲이, 방장산에는 6각 지붕의 방장정이 배치되어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세상에서 말하기를 삼신산은 우리나라에 있으니, 금강산은 봉래산이고, 지리산은 방장산, 한라산은 영주산이라고 한다.”

현재 남원 광한루 삼신산 안내판도 출처는 밝히지 않았지만 위 구절을 따르고 있다. 사진의 가운데 대숲의 있는 섬이 봉래산이고 왼쪽 다리를 건너면 방장산의 방장정이 있고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영주산의 영주각이 있다.


광한루를 바라 보았을 때 왼쪽에 방장산이 위치하고 6각지붕의 방장정이 세워져 있다. 작은 다리는 가운데 위치한 봉래산에 연결되어 있다.




광한루원에서 광한루를 바라보았을 때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섬이 영주산이며 영주각이 세워져 있다. 외부에서 영주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다리가 놓아져 있다.








3개의 섬 가운데 가운데 위치한 섬이 봉래산(蓬萊山금강산)이다. 우거진 대숲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푸르게 만든다.



광한루(廣寒樓) 우리나라 4대 누각(경복궁 경회루,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국보 제281.

이 건물은 조선시대 이름 난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에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 세종 26(1444) 정인지(鄭麟趾)가 건물이 전설 속의 달나라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를 닮았다 하여 광한루(廣寒樓)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 선조 15(1582)에는 전라도 관찰사 정철이 광한루 앞에 요천(남원을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강)의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뜻하는 못을 파고네개의 반월형 교각으로 된 오작교를 놓아 정원을 조성하였다




인공정원 속에 건립된 대표적인 누인 광한루는 앞면 5, 옆면 4칸 팔작지붕의 이익공계(二翼工系) 다락집이다. 지금은 동쪽에 3칸의 부속건물이 붙어 있고, 북쪽에 팔작지붕을 중첩한 3칸의 계단을 두어 4면의 모습이 모두 약간씩 다르다. 아래층의 기둥은 둥근 석주이며 의장효과를 위해 모서리에는 네모난 석주를 세웠다.





광한루원 앞에는 동서 100m 남북 59m에 이르는 정방형의 호수와 호수 속 3개 섬(삼신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숫가에는 매우 특이한 바위가 하나 있다.

광한루 앞 오작교 입구에화강암으로 곱게 깎아 만든 큰 자라돌이 삼신산(三神山)을 바라보고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이 앉아 있다이 자라돌은 높이 1.2m, 폭 1.2m, 길이 2.4m의 크기로서그 옆에 설명을 적은 석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자라돌을 두게 된 연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남원지(南原誌)의 기록에는 오석(鼇石)을 자라로 보느냐거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른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그 하나는 광한루원이 우주를 상징하는 정원으로 꾸며졌다는 신선사상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원의 풍수지리와 관련된 것이다.

신선사상과 관련된 내용부터 살펴보면, 예부터 동해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자라가 등에 삼신산(三神山)을 업고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광한루 연못에 삼신산을 지은 후로는 계속하여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분석해본 결과 삼신산을 업고 있는 자라가 없었기 때문에 섬이 불안정하여 그렇다 하여, 이곳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로부터는 그 천재지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이 오석(鼇石)을 자라(鼇)가 아닌 거북(龜)으로 보는 것인데, 지리산에서 바라봤을 때 동남방에 위치한 남원에는 예부터 지리산에서 동남풍만 불어오면 나쁜 유행병이 퍼져 인명이 상하거나 혹은 화재, 홍수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오행설에 의하면, 이러한 동남풍을 제압하려면 동해(東海)에 사는 거북의 힘밖에 없다 하여 광한루에 이 거북상을 만들었다고한다. 그후부터는 동남풍으로 인한 천재지변이 없어졌다고 한다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를 적은 3점의 현판이 걸려있다.

광한루(廣寒樓) 는 이름은 한자로 풀어보면 넒은 광()’, ‘찰 한(). 넓고도 차다는 의미라고 해야 할 것이나, ‘광은 넓고도 넓은 우주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은 맑으면서도 차가운 은하수를 상징하는 말이다. 천상의 세계를 지상에 재현하여 세워 놓은 것이 바로 광한루라는 의미이며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현판에 적혀있는 계관(桂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달나라에 가서 살 수는 없었으니 아예 땅위에 이상향인 월궁을 세운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의 배포가 대단하다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말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광한루 누마루 밑의 기둥의 모습이다.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근 것이니겉으로는 네모난 돌기둥을안으로는 둥근 나무기둥을 배열하여 하나의 우주를 열어 두었다. 하지만 광한루 누마루 밑은 일제강점기 선열들의 고통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10년부터 18년간 2층 누마루는 재판소, 아랫층은 감옥으로 썼다고 한다. 191943~4일 울려퍼졌던 남원의 독립만세운동 외침도 이곳에 갇혀 피를 토했을 것이다. 돌기둥마다 칸막이를 위해 파낸 홈들이 남아 있다.








서편에는 길이 57m, 2.4m, 4개의 홍예경간으로 구성된 오작교가 있는데 현존하는 연지교 중 국내에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선조15(1582)에 남원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다리를 새로 놓고 오작교라 부르게 됐다. 그 이후 광한루는 정유재란때 불타 1626년 복원됐지만 오작교는 처음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오작교는 평교이지만 직선적이고 평탄한 노면에 율동감을 주어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연못에는 직녀가 베를 짤때 베틀을 고이는 지기석(支機石)을 넣고 견우가 은하수를 건널때쓰는 배인 상한사(上漢沙)를 띄워 칠월 칠석 전설인 은하수를 건너는 다리인 오작교를 상징하고 있다.


오작교(烏鵲橋)는 고대 소설 "춘향전(春香傳)"에서 춘향과 이도령(李道令)이 사랑을 속삭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연못에는 광한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많은 기증으로 3,000여 마리의 토종 잉어와 비단 잉어가 살고 있다그 엄청난 크기에 놀랬다. 사람 팔뚝만한 것이 아니라 성인 남자의 장단지만큼 살쪄있다. 이곳에는 사람 얼굴 모습을 닮은 인면어가 10마리 살고 있어 이를 찾아보는 즐거움 또한 크다고 하는데 직접 보질 못했다.

 

광한루원 뒤편에는 춘향사당이 있다. 1931년 건립한 사당인데, ‘열녀춘향사현판 밑에 거북을 타고 바다를 헤치며 용궁길을 안내하는 듯한 토끼 형상이 눈에 띈다. 뜬금없어 보이는 거북·토끼 위엔 태양까지 그려져 있어 왜색이 느껴진다.

열녀춘향사를 세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으로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비녀, 반지등을 팔아 모은 권번 여성(기생)들이 주체가 되어 세웠다고 한다열녀춘향사’ 현판 밑에 거북을 타고 바다를 헤쳐나오는 토끼 형상이 눈에 띈다뜬금없어 보이는 거북·토끼 위엔 태양까지 그려져 있어 왜색이 느껴진다

안에 걸린 춘향 영정은 친일화가 이당 김은호의 그림이다그는 일제시대 여성단체들이 금비녀 등을 팔아 일본의 전쟁물자를 사는데 쓰도록 한 모습을 금차봉납도라는 그림으로 그려 미나미 총독에게 바친 인물이다. 춘향의 오로지 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기리는 사당에 두 마음 품은 친일화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이 걸려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누각의 뒤편 옆에는 비석군이 정렬해 있다. 안내문을 보니 남원과 인연이 있는 관리들이나 어사들의 사적비 및 선정비로 남원 각처에 있던 비석들을 훼손될까 봐 한 곳에 모은 것이라 한다. 저 많은 선정비가 세워진 관리들 모두가 재임시절 진정 백성들을 위해 선정(善政)을 베풀었을까? 새로 부임한 후임자가 혹시 후일을 생각하여 아랫것들을 시켜 선임자의 환심을 사기위해 세운 경우는 없었을까?

탐관오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갑오동학농민운동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되는 고부군수 조병갑, 그 조병갑이 함양군수를 지낼 때는 유민을 편케하는 등 사심없는 선정을 베풀어 세웠던 선정비도 있으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