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jiduk Gazebo
[영양] 두들마을 / 석계고택 본문
영양 두들마을 여행 / 2016.09.05.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이곳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과 굴욕적인 외교를 맺게 되자 1640년(인조18년) 석계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은 명나라에 대한 절의(節義)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며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후 이시명 선생은 안동으로 옮겨 갔으나, 그의 사후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이 다시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살게 되었고, 후손들이 계속 더해져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집성촌 마을이 되었다.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 채가 조성되어 있다. 특히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장계향(이시명의 부인)을 기리는 안동 장씨 유적비 등이 있다.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1590~1670) 선생의 자는 화숙이며 호는 석계입니다. 석계는 부친 운악 이함의 5형제 중 3남으로 1590년 영해부 인량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석계는 1612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지만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갖추는 삼전도의 치욕적인 굴욕을 통탄하며 선생은 영해의 인량리(나랏골)에서 영양의 석보(두들마을)로 옮겨와 석계초당을 짓고 네 아들과 함께 은둔하며 속세를 등집니다.
또한 1653년에 선생은 세상에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요령으로 일월산 수비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보다 못한 부인 장계향이 권유를 하여 처갓집 인근인 안동 풍산읍에 거처를 정하여 명나라의 이름을 따 대명동이라 이름 짓고 후학 양성에 매진합니다.
장인 경당 장흥효(1564~1633)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석계 이시명 선생은 처사의 삶을 사는 올곧은 장인 장흥효처럼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시명 약력
△1590년 영해 출생 △1612년 성균관 유학 △1624년 향시 합격 △1637년 능을 지키는 ‘강릉(康陵)참봉’에 임명됐으나 부임하지 않음 △1640년 영양 석보로 이사 △1653년 영양 수비로 거처 옮김 △1672년 자손의 장래와 교육 위해 안동 도솔원(풍산읍 수곡리)으로 이사 △1674년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