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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어본입학다완(御本立鶴, ごほんたちづる)

곤지둑 2016. 3. 28. 09:40

"부산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일본과 무역을 하던 삼포 왜관 중 가장 오래 개항된 무역항이었습니다그래서인지 옛 조선 사발들도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많이 돌어갔습니다

임진왜란 후에는 왜인이 하도 간청해 부산 왜관을 개항합니다그 뒤 왜인이 왜관 내에 도자기 가마틀 만들어 운영합니다이 왜관 내에서 만든 사발을 어본 다완(御本茶碗, 고혼 자완)이라 합니다. 어본 다완[각주:1]이란 일본이 디자인해서 주문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필자는 부산 왜관요[각주:2] 에서 생산된 조선 사발 들을 통틀어 '주문부산사발이라칭합니다.

비록 일본이 주문했으나 조선의 흙으로 조선의 사기장(일본명 도공)이 빚어서 일본으로 보낸 사발입니다이떻게 보면 조선과 일본 최초의 합작 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중략>

부산 왜관요에서 사용되는 경비는 쓰시마에서 가장 커다란 사업 경비였습니다. 1718년 쓰시마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 덕분에 이미 일본에서는 사발 만드는 능력이 발달하게 되어 조선의 주문품 사발이 필요없어졌습니다.

또한 부산 왜관요에 들어가는 많은 경비를 막부(일본 정부)에서 차용해 썼으나, 막부에서 이것을 중단하면서 부산 왜관요에서는 사발 생산을 일시 정지하게 되었고 급기야 1743년에는 완전히 중단됩니다.

[신한균(2005).「사기장 신한균의 우리 사발 이야기」. 서울:(주)가야넷]에서 인용


초량왜관의 모습을 그린 변박의 '왜관도'[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어본입학(御本立鶴, 고혼다지쯔루)은
일본 에도 정권의 3대 통치자[일본 에도시대 제3대 쇼균 도쿠가와 이에미쓰( Tokugawa Iemitsu, 德川家光)]이 細川三齊[각주:3]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입학(立鶴) 밑그림을 바탕으로 주문한 찻사발을 부산의 왜관요에서 빚은 어본다완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다완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을 가져간 것은 청자다완분청다완이도다완웅천다완 등이고나머지 소바다완도도야다완이라보다완고쇼마루다완고혼다완 등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주문 제작하여 가져간 것이다.

더욱이 고혼(御本)을 모방한 고쇼마루(御所丸)는 완전한 일본의 형태요, 색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부산요의 도자기는 조선식과 일본식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작품이었다. 조선의 백토에 붉은 색을 띠는 황색의 유약을 바르고 거기에 백유, , 청화등으로 학, 해바라기 등의 꽃문양을 그렸다. 또한 고혼의 흙에는 맑은 홍매(紅梅)색의 반점이 있어서 다인들의 사이에서는 차의 녹색을 우려내는 역할을 한다하여 감상의 주안점이 되어 왔다. 또한 이 반점을 고혼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 부산 왜관요에서 차사발을 빚기 위해 쓰시마에서는 다두(차회를 주관하여 차회에서 차사발을 선별하는 사람으로서 대체로 심미안이 높은 차인)와 도공두(사기장의 우두머리로 우리나라의 변수에 해당)를 파견하였으며, 그 이후 왜인들의 기호와 유행에 맞추어 그들이 어본 다완이라 부르는 사발들을 본격적으로 생산해 가지고 갔습니다. 이때 사발들은 대부분 조선의 기술로 제작되었으나 일본의 주문품이라 일본식 차사발 형태를 띠고 있다. [본문으로]
  2. 부산의 倭館窯(釜山窯 1639-1717)는 약 80년간 주로 다기를 제작하던 가마였다. 조선다기를 최고로 여기던 일본인들은 쓰시마를 통해 일정량의 조선다기를 구하였다. 이후 경제적 부를 축척하면서 다기를 찾는 수요가 많아지자 왜관 내에 요를 만들어 조달하였다. 일본은 그들이 원하는 형태와 문양을 도안하고 조선정부의 승인아래 조선의 흙(고령토), 불, 그리고 도공의 솜씨를 빌어서 왜관요에서 다기를 생산하였다. 이것들은 일본인들의 취양대로 해석되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순수한 우리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본문으로]
  3. 호소카와 산사이[세천삼제(細川三齊)] 센노 리큐[천리휴(千利休)]의 여섯 제자(弟子) 가운데 고호리 엔슈[소굴원주(小堀遠州)]와 함께 일본 다도(日本 茶道)의 선구자(先驅者)로 평가(評價)받는 인물(人物)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출병(出兵)하지 않은 왜장(倭將)인데, 원래(原來) 사무라이[시(侍)] 출신(出身)이지만 당시(當時) 몇 안 되는 교양인(敎養人)이자 지식인(知識人) 무사(武士)였고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한 다인(茶人)이었으며 예술(藝術)에도 조예(造詣)가 깊은 인물(人物)이었다고 함 산사이[삼제(三齊)]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의 아들을 축출(逐出)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德川家康)]가 일본(日本)의 최고 권력자(最高 權力者), 즉 쇼군[장군(將軍)]이 되는데 적극(積極) 협조(協助)함으로써 후젠고쿠[풍전국(豊前國)]의 책임자(責任者)로 파견(派遣)되었는데, 이때 경남(慶南) 사천(泗川)에서 끌려온 김전계(金奠階 : 일본명(日本名)은 ‘손카이’임)를 데려가 후젠[풍전(豊前)] 호소카와[세천(細川)]번(藩)의 아가노야키[상야소(上野燒)]를 개설(開設)함으로써 당시(當時) 일본 천하(日本 天下)의 7대요(七大窯)로 성장(成長)하기도 했음 [본문으로]